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적 접촉과 요동의 정세 === 명나라의 홍무제 주원장과 고려의 접촉은 공민왕 무렵에 처음 시작되었다. 1368년 주원장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라는 인물을 보내[* 설사의 형인 [[설손]](偰遜)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귀화했었는데, 이를 감안한 인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설손의 장남이 훗날 대명 외교전문가로 활약하는 [[설장수]]였다.] 고려에 자신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다음해 사신이 도착하자 공민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융숭하게 대접했고, 명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여 명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었다. 고려의 편입에 대해 당초의 홍무제는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건국 초기 [[북원]](北元)을 주시하고 상대해야 했던 명나라의 홍무제에게, 고려의 외교적 가치는 상당한 편이었다. 고려와 명나라가 관계를 맺은지 불과 3년 뒤인 1372년만 해도, 북원의 [[코케 테무르|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가 서달의 수만 대군을 격파할 정도로 당시의 북원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http://egloos.zum.com/magneo/v/1065191|대략적인 내용.]]] 비록 명나라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으로 북원의 세력은 많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요동 등지에는 잘라이르 [[나하추]](納哈出) 등이 횡행하고 다니는 판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고려는 명과 북원의 이러한 대립 상황을 인지하고 양쪽을 외교적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김경록] 고려는 명나라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고 친명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북원의 세력과도 완전히 손을 끊지 않았기에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북원과 고려의 외교적 결합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요양행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원 세력은 원나라의 [[유익]](劉益)이 명나라에 항복한 이후, 급속하게 요동의 나하추 세력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하추의 세력은 사서에 >"소속 100,000명으로, [[송화강]] 북쪽에 있다."[* 《[[명사(역사책)|명사]]》(明史) 권 129, '納哈出將士妻子十余萬屯松花河'] 고 일컫어질 정도였는데, 그 절정기에는 한때 200,000 명 가까이 되기도 했다. 나하추는 이 세력을 이용해 명나라의 요동 진출을 막고 있었다. 나하추는 아직 세력이 절정에 오르기 전인 1362년 전 쌍성총관인 [[조소생]](趙小生) 등의 회유로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하추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에게 연거푸 패배했다, 이성계의 이 승리는 [[원나라]]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의 동북면 영토를 원나라 침략의 위협에서 확고하게 탈출하게 만들었고, 고려의 영토임을 각인시킨 승리라고 평가된다.[* <1362년 이성계와 납합출의 전투>, 강수정.] 이성계에게 패배한 이후 나하추는 고려에 대한 공격 의사를 포기하고,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오히려 긴밀한 연결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하추의 세력은 북원의 본거지에 대해 주력하고 있었던 명나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데, 1372년 11월 나하추는 요동의 명군 전초 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해 창고를 불태워 양식 10만여 석을 없애고, 명군을 무려 5,000명이나 몰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가장은 명나라 초기 요동 해운의 마지막 종착지로서 요동 최고의 군량 보급 창고가 있었던 장소였다. 따라서 나하추의 우가장 전투 승리는 명나라의 요동 보급로를 차단하고, 요동에서 장기적인 포석을 다지려는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지만 강남 전투의 패전으로 보아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실제로 명군이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니까 금방 항복했다. 1372년 1월 서달이 당한 대패와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우가장 전투의 승리는 북원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나하추는 1374년 11월의 요양(遼陽) 공격, 1375년 12월의 대규모 공세 등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명나라의 적절한 대처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하추 쪽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자 나하추는 고려와의 외교적 연대에 주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